곶자왈이 부르는 것
AI AI가 만든 창작 픽션입니다(음성·이미지도 AI 생성). 실제 사건·인물·단체·장소와 무관합니다.

현수가 제주에 내려온 건 순전히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서울에서의 삶이 무너진 뒤—약혼자와의 파국, 직장 퇴직, 그리고 어머니의 부고가 거의 같은 달에 연달아 닥쳤다—그는 더 이상 익숙한 것들의 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다. 지하철 냄새, 편의점 냄새, 자신이 살던 원룸 복도의 냄새. 모든 것이 그 삶의 잔해 같았다. 친구 하나가 제주 한경면 쪽에 빌려 쓸 수 있는 작은 농가 주택이 있다고 했고, 현수는 그것을 붙들었다. 달리 붙들 것이 없었다.
집은 생각보다 낡고 생각보다 외졌다. 마을에서도 한참 안쪽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포장도로가 끝나고 자갈길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양옆으로 곶자왈 숲이 바짝 붙어 있었다. 제주 사람들이 곶자왈이라 부르는 그 숲은 현수가 알던 어떤 숲과도 달랐다. 화산암 덩어리들 위에 나무들이 뒤엉켜 자라는 방식이, 마치 땅이 허락한 것이 아니라 땅을 강제로 뚫고 나온 것 같았다. 뿌리들이 바위를 감싸 안고 있는 게 아니라 바위와 뿌리가 서로를 집어삼키는 중인 것처럼 보였다. 낮에도 그 안은 어두웠다. 빛이 들어오는 방식이 달랐다. 새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허용된 자리에만 조심스럽게 놓이는 것 같았다.
첫 며칠은 그냥 잤다. 열두 시간씩, 때로는 열네 시간씩. 알람도 맞추지 않고, 커튼도 치지 않고, 그냥 몸이 요구하는 대로 잤다. 꿈은 거의 없었다.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깨어나면 창밖으로 곶자왈 가장자리가 보였고, 새소리가 들렸고, 바람 소리가 들렸다. 서울에서는 결코 들리지 않던 종류의 고요였다.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소리들이 제자리에 있는 고요. 현수는 그 고요 속에서 조금씩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닷새째 되던 날, 그는 처음으로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집 앞 자갈길이 곶자왈 쪽으로 이어져 있었고, 발이 그쪽으로 향했다. 입구 부근에는 누군가 오래전에 세워둔 듯한 나무 표지판이 있었는데, 글씨가 거의 지워져서 읽을 수가 없었다. 숲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온도가 달라졌다. 바깥보다 분명 서늘했고, 습했고, 냄새가 달랐다. 이끼 냄새와 썩은 나무 냄새, 그리고 그 아래 층에 뭔가 더 오래된 냄새가 있었다. 흙이 아니라 흙보다 더 깊은 무언가. 현수는 그게 화산암 아래에서 올라오는 냄새라고 생각했다.
길이랄 것은 없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있는 자리를 따라 걸었는데, 그것도 이내 희미해졌다. 그는 방향을 잃지 않으려고 들어온 방향을 계속 의식하면서 걸었다. 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가끔 비스듬히 내려왔고, 그 빛 속에서 먼지 같은 것들이 떠다녔다. 포자인지 먼지인지 알 수 없는 것들. 발밑의 현무암 덩어리들이 이끼에 덮여 있어서, 디딜 때마다 발이 조금씩 미끄러졌다. 조심하지 않으면 발목을 다칠 수 있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그는 작은 공터 같은 곳에 이르렀다. 나무들이 조금 물러서 있어서 하늘이 보이는 자리였다. 그 한가운데 큰 현무암 덩어리가 있었는데, 표면이 너무 매끄러워서 자연석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다듬은 것처럼. 하지만 그것보다 현수의 눈을 끈 것은 돌 위에 놓인 물건들이었다. 귤 껍질—아직 마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과 작은 사기 잔, 그리고 뭔가를 태운 재. 누군가 최근에 다녀간 것이었다. 마을 사람이 지내는 제사 같은 것이라고 현수는 생각했다. 제주에는 그런 풍습이 있다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짧게 느껴졌다.
그날 밤,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숲 안에 있었다. 낮도 밤도 아닌 빛 속에서.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사람 목소리 같기도 하고 나무가 삐걱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는 소리 쪽으로 걸어갔다.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소리가 멈추고, 바로 옆에서—귀 바로 옆에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꿈이 거기서 끊겼다. 눈을 뜨니 새벽 세 시였고, 창밖이 완전한 어둠이었다.
이튿날에도 그는 숲으로 갔다. 어제의 꿈 때문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냥 걷고 싶어서. 공기가 좋아서. 이번에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발이 또 그쪽으로 향했다. 어제 왔던 공터가 다시 나왔다. 현무암 위의 제물들이 그대로 있었다. 귤 껍질은 이제 조금 말라 있었다. 현수는 그 주변에 서서 잠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뭔가 잘못되었다는 감각.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물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 숲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된다는 느낌.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
그는 돌아섰다. 그런데 올 때와 길이 달라 보였다. 나무들의 배치가 기억과 달랐다. 분명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데, 처음 보는 나무들이 나왔다. 그는 방향을 수정했다. 또 달랐다. 패닉이 오기 전에—그는 억지로 호흡을 느리게 했다. 핸드폰을 꺼냈다. 신호는 없었지만 나침반 앱은 작동했다. 북쪽을 확인하고, 체계적으로 걸었다. 결국 이십 분쯤 뒤에 자갈길이 보였다. 그는 숲 밖으로 나왔을 때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저녁, 마을 쪽으로 내려갔다가 편의점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농가 주택에 머무는 외지인이라고 소개했더니, 할머니는 조용히 현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곶자왈에 들어갔수꽈?"

현수가 예, 라고 하자 할머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서운 표정이 아니라, 안타깝다는 것도 아닌, 그냥—알아버렸다는 표정.
"저 숲은 예부터 사람을 부르는 수가 있어요. 특히 마음에 구멍 난 사람. 빈자리 있는 사람. 그쪽이 들어오면 숲이 채워주려 해요. 자기 방식으로."
현수는 웃으며 흘려들었다. 제주 토속 신앙이겠거니. 고마워요, 하고 돌아섰다. 할머니가 뒤에서 한 마디 더 했다.
"한 번 부르면 계속 부릅니다. 부를 때마다 더 깊이."
현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 밤 꿈은 전날보다 선명했다. 공터였다. 현무암 위에 제물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것도 있었다. 사람 같은 형상이 돌 옆에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형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현수는 그것이 어머니라고 느꼈다. 느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보인 것이 아니라. 형상이 입을 열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런데 현수는 알 수 있었다. 형상이 말하는 것이 이름이라는 것을. 자신의 이름을.
그는 사흘 연속 꿈을 꾸었다. 매번 같은 공터, 매번 같은 형상, 매번 조금씩 가까워지는 형상. 세 번째 꿈에서는 형상이 손을 내밀었다. 현수의 손이 저도 모르게 뻗어 나가는 느낌이 있었고, 그 순간 잠에서 깼다. 식은땀이 흠뻑 젖어 있었다. 새벽 세 시였다. 창밖을 보니 달이 없었고, 곶자왈 가장자리가 완전한 검은 벽처럼 서 있었다. 그런데—그는 눈을 비볐다—검은 벽 안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빛났다. 반딧불이 치고는 움직임이 너무 느리고, 위치가 너무 일정했다. 빛이 아니라 빛의 흉내 같은 것.
현수는 그날 처음으로 짐을 싸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이 집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 그런데 아침이 되자 그 결심이 흐릿해졌다. 커피를 마시고, 창밖을 보고, 새소리를 들으니—어젯밤의 공포가 과장된 것 같았다. 꿈은 꿈이고, 창밖의 빛은 착시였을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침에, 이 고요 속에서. 떠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는 걸 현수는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짐을 쌀 결심을 아침이면 잊어버린다는 것. 숲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발이 먼저 그쪽으로 간다는 것. 자신이 제주에 온 것은 도망치기 위해서였는데, 이제 제주에서 도망칠 생각을 못 하고 있다는 것.

열흘째 되던 날, 그는 다시 숲으로 갔다. 이번에는 더 깊이 들어갔다. 자신도 모르게. 공터를 지나쳐서, 그 너머로. 곶자왈 안쪽은 바깥보다 훨씬 고요했다. 바람이 없었다. 소리가 없었다. 발밑 현무암들이 점점 커졌고, 나무들의 뿌리가 점점 더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현수는 그쪽으로 걸었다. 용암동굴 위로 물이 고인 자리가 있었다. 거울처럼 평평한 수면. 그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물을 들여다보았다.
수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그런데—잠깐. 그는 눈을 깜빡였다. 수면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같은 윤곽이었지만, 표정이 달랐다. 자신은 지금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데, 수면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천천히, 분명하게. 현수는 벌떡 일어섰다.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심장이 갈빗대를 두드렸다. 다시 수면을 보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놀란 얼굴, 창백한 얼굴.
그는 뛰었다. 제대로 뛰었다. 방향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멀어지고 싶었다. 나뭇가지에 긁히고, 현무암에 발이 걸려 한 번 넘어지고, 무릎에서 피가 났다. 그래도 뛰었다. 그리고 얼마 뒤—자갈길이 나왔다. 그는 자갈길 위에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쉬었다.
집에 돌아와 무릎을 닦고, 소파에 앉아, 그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착시였다. 물 위의 반사는 이상하게 굴절되기 마련이다. 표정이 달라 보인 건 그냥 물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수면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웃음이—낯설지 않았다는 것. 어디선가 본 웃음. 누구의 웃음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게 더 무서웠다.
그날 밤, 그는 꿈을 꾸지 않았다. 대신 새벽 두 시에 잠에서 깼다. 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무언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집 안의 공기가 달랐다. 낮보다 습했고, 차가웠다. 그리고—냄새가 났다. 이끼 냄새. 썩은 나무 냄새. 그리고 그 아래의 더 오래된 냄새. 곶자왈의 냄새였다. 집 안에서. 현수는 일어나 불을 켰다.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문도 잠겨 있었다. 그런데 냄새는 분명히 났다.
그는 방 안을 천천히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마루 위에 무언가 묻어 있었다. 진흙인지 이끼인지 모를, 어두운 색의 흔적. 현관에서 방 쪽으로 이어지는 흔적. 발자국 같았다. 사람의 발자국 같았는데—발 모양이 조금 이상했다. 발가락이 너무 길거나, 발의 비율이 맞지 않는 것 같은. 현수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발은 양말을 신고 있었다. 흔적은 맨발이었다.
그는 그날 밤 잠을 자지 못했다. 불을 다 켜두고, 소파에 앉아, 문을 바라보며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아침이 오면 짐을 싸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아침이 왔다. 현수는 짐을 쌌다. 정확하게는, 짐을 싸려고 가방을 꺼냈다. 그런데 손이 멈추었다. 그는 그것을 느꼈다—의지가 아니라 몸이 멈추는 것을. 손을 내려다보니 손이 가방 손잡이를 잡은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손에게 명령했다. 가방을 열어. 손이 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더 강하게 명령했다. 그제야 손이 천천히, 마치 수중에서 움직이듯, 가방을 열었다.
그는 그 순간 깨달았다. 혹은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열흘 동안 숲에 계속 끌려 들어간 것, 결심이 아침이면 사라진 것, 뛰쳐나왔는데도 집에 돌아온 것—이 모든 것이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그를 붙들고 있었다.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마음에 구멍 난 사람. 빈자리 있는 사람. 자기 방식으로 채워주려 한다는 말.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것이 연결되었다. 수면에 비친 웃는 얼굴. 누구의 웃음인지 끝내 떠오르지 않았던 그 웃음. 현수는 눈을 감았다. 억지로 기억을 밀어붙였다. 그리고—떠올랐다. 그 웃음은 자신의 웃음이었다. 자신이 행복했을 때의 웃음. 약혼자와 처음 제주에 여행 왔을 때,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었을 때. 그 얼굴. 곶자왈은 그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잃어버린 자신을. 빈자리를 채우는 방법으로.
그는 가방에 짐을 넣었다. 천천히, 하나씩. 손이 저항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더 무서웠다.

차를 타고 자갈길을 빠져나오면서, 현수는 백미러를 보았다. 농가 주택이 작아지고 있었다. 그 뒤로 곶자왈 숲이 서 있었다. 빽빽하고 어둡고 고요한. 그는 백미러에서 눈을 뗐다. 앞을 보고 달렸다.
공항에 도착해서 탑승권을 뽑았다. 서울 김포행. 출발까지 두 시간이 있었다. 그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손이 조금 떨렸다. 창밖으로 제주의 하늘이 보였다. 맑았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제주가 작아졌다. 초록 섬, 검은 해안, 그리고 내륙의 짙은 초록 덩어리들—곶자왈들. 현수는 창에서 눈을 거두었다. 눈을 감으려다가 멈추었다.
핸드폰에 알림이 와 있었다. 며칠 전에 찍은 사진들. 자동으로 생성된 추억 앨범이었다. 그는 무심코 열었다. 숲 사진들이었다. 곶자왈 안에서 찍은 것들. 나무들, 현무암, 이끼. 그리고—공터 사진. 현무암 위의 제물. 현수는 그 사진을 넘기려다 멈추었다.
사진 속 현무암 옆에 사람이 서 있었다.
현수는 그 사진을 찍을 때 혼자였다. 분명히 혼자였다. 사진 속 사람은 현수 쪽을 향해 서 있었는데,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빛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얼굴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손이 들려 있었다. 현수 쪽으로. 마치 사진을 찍는 사람 쪽으로 손을 내미는 것처럼.
현수는 사진을 닫았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창밖을 보았다. 이제 제주는 보이지 않았다. 구름 아래로 사라진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 눈을 감는 순간, 어둠 속에서 느껴졌다.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손가락 끝이 따뜻했다. 마치 누군가 잡고 있는 것처럼. 그는 손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내려다보면 안 된다는 것을, 이유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었다.
비행기는 북쪽으로 날아갔다. 현수의 손은 그의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손 주변의 공기가 서늘했다. 이끼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