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림동 골목의 방향
AI AI가 만든 창작 픽션입니다(음성·이미지도 AI 생성). 실제 사건·인물·단체·장소와 무관합니다.

이월 중순의 양림동은 낮에도 차갑다. 관광 안내 책자에는 '근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골목'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 그곳을 처음 걸었을 때 정우가 느낀 것은 숨결이 아니라 정지였다.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은, 아니 시간이 한 번도 흐른 적 없는 것 같은 감각. 1920년대 선교사 주택의 붉은 벽돌담과 좁은 골목길이 만들어 내는 그 특유의 침묵은, 도심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완전하고 두터웠다.
정우는 도시 재생 프로젝트 관련 취재를 맡은 잡지사 프리랜서였다. 편집장은 "양림동 근대 골목의 현재를 담아 오라"고 했고, 정우는 이틀 일정으로 숙소를 잡았다. 펭귄마을 입구 근처의 작은 게스트하우스였다. 주인 할머니는 체크인 때 열쇠를 건네면서 딱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녁에 골목 안쪽으로는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마세요." 정우는 그 말을 관광지 특유의 낡은 주의 사항쯤으로 흘려들었다. 할머니의 눈빛이 조금 오래 머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첫날은 순조로웠다. 정우는 양림동 언덕을 오르내리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장우 가옥의 돌담, 우일선 선교사 사택의 나무 창틀, 골목 모퉁이마다 붙은 손으로 쓴 안내판들. 오래된 건물들은 낮 햇살 아래에서는 고즈넉하게 아름다웠다. 군데군데 벽화가 그려진 골목에는 간간이 관광객이 지나갔고,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담벼락에 부딪혀 낮게 깔렸다. 정우는 메모장에 인상을 적고, 동네 어르신 몇 명과 짧은 인터뷰를 나눴다.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도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샤워를 하면서 문득, 오늘 찍은 사진 속에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관광객도 분명 지나쳤는데. 카메라를 꺼내 확인하자 실제로 그랬다. 인물이 찍혀야 할 자리마다 골목만 있었다. 흔들린 것도 아니었다. 그냥, 없었다.
이튿날 아침 정우는 일찍 나섰다. 전날 미처 가지 못한 골목 안쪽을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양림동의 골목은 겉에서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막상 들어가면 미로처럼 이어진다. 담벼락 사이의 좁은 통로가 예고 없이 꺾이고, 꺾인 길이 다시 막다른 골목으로 연결되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열린다. 정우는 지도 앱을 켜 두었지만, 골목 안에서는 위성 신호가 자꾸 끊겼다. 오전 내내 걸으면서 메모를 채우고 사진을 찍었다. 오래된 기와집 처마 아래로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고, 이끼 낀 돌계단은 서리에 덮여 희끗했다. 어딘가에서 새가 울었는데, 그 소리가 한 번 울고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오후 두 시쯤 정우는 낯선 골목 앞에 섰다. 지도에는 표시가 없었다. 양림동의 주요 동선에서 살짝 벗어난 곳, 붉은 벽돌담이 양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통로였다. 담 위로 나뭇가지가 뻗어 하늘을 가렸고, 그 때문에 안쪽은 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입구에 낡은 나무 전봇대 하나가 서 있었는데, 거기에 작은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오래된 종이라 모서리가 말려 있었지만, 먹으로 쓴 글씨는 또렷했다. '들어오시는 분께. 이 길은 한 번 들어오면 나가는 방향을 잊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날짜는 없었다. 정우는 그 종이를 카메라로 찍고, 골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취재 소재가 될 것 같았다.
처음 십여 미터는 아무것도 없었다. 담벼락과 마른 낙엽뿐이었다. 그런데 스무 걸음쯤 들어섰을 때, 정우는 발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발소리가 벽에 반향하는 방식이, 조금 전까지 걸었던 골목들과 달랐다. 소리가 너무 늦게 돌아왔다. 마치 골목이 실제보다 훨씬 넓거나, 아니면 양쪽 담 너머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펼쳐진 것처럼. 정우는 멈춰 서서 손바닥으로 벽을 짚었다. 벽돌은 차가웠다. 차가운 정도가 아니라, 손이 닿은 순간 손가락 마디가 저릿할 만큼 냉기가 올라왔다. 이월의 바깥 공기보다도 훨씬 낮은 온도였다. 정우는 손을 거뒀다. 심박이 조금 빨라진 것을 느꼈지만, 계속 걸었다.
골목은 한 번 꺾였다. 꺾인 자리에 낡은 일본식 목조 가옥의 잔해가 있었다. 지붕은 반쯤 내려앉았고, 창문 자리에는 창이 없었다. 그런데 그 빈 창문 틀 안쪽이, 유독 어두웠다. 집 내부가 어두운 것은 당연하지만, 그 어둠은 조금 달랐다. 낮의 빛이 전혀 스며들지 않는 것처럼, 완전히 검었다. 정우는 카메라를 들어 플래시를 켜고 셔터를 눌렀다. 플래시가 번쩍이는 순간, 찰나의 섬광 속에서 정우는 창문 안쪽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형태를 인식하기 전에 빛이 꺼졌다. 정우는 카메라 화면을 열었다. 사진 속 창문 안은 그냥 어두웠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정우의 뒷목 피부가 오소소 돋았다. 뭔가를 본 것 같다는 확신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진 속 증거보다 더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그 집을 지나쳐 조금 더 걸었을 때, 정우는 소리를 들었다. 발소리였다. 자신의 것이 아닌 발소리. 골목 뒤쪽에서, 자신이 걸어온 방향에서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느렸다. 정우는 뒤를 돌아봤다. 골목은 비어 있었다. 발소리는 계속됐다. 정우는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우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발소리도 함께 빨라졌다.

골목이 다시 꺾이고, 그 앞에 작은 공터가 나왔다. 공터 한가운데에 낡은 우물이 있었다. 뚜껑 없는 우물이었다. 정우는 우물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발소리도 멈췄다. 공터에는 정우밖에 없었다. 우물을 내려다보자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물은 없었다. 아니,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우물 안에서 바람이 올라왔다. 위에서 아래로 부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그 바람에서 냄새가 났다. 흙 냄새와 나무 냄새, 그리고 오래된 종이 냄새. 어딘가 낯익은 냄새였는데, 정우는 그것이 어디서 맡아 본 냄새인지 즉시 떠올리지 못했다.
공터를 빠져나오는 길을 찾으면서 정우는 처음으로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공터 주변으로 세 개의 골목이 이어졌는데, 어느 쪽이 자신이 들어온 방향인지 알 수 없었다. 스마트폰 지도는 여전히 신호가 없었다. 정우는 세 골목 중 가장 밝아 보이는 쪽을 택했다. 걸으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두 시 반이었다.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 있었다. 자신을 다독이며 걸었다.
그런데 골목을 따라 걷는 동안, 정우는 담벼락에 붙은 것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는데, 한 번 눈에 들어오자 계속 보였다. 작은 종이들이었다. 담 곳곳에, 낮은 위치에, 먹으로 글씨가 쓰인 종이들. 대부분은 오래되어 내용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중 몇 장은 글씨가 또렷했다. '열다섯 해 전에 들어왔습니다.' '나가는 길을 찾다가 지쳤습니다.' '이 골목은 나가는 방향이 없습니다.' 정우는 발이 굳었다. 다음 종이를 읽었다. '이 길을 읽는 분께. 우물 옆 집에 들어가지 마세요.' 정우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어느새 아까 그 반쯤 무너진 일본식 목조 가옥 앞이었다. 같은 집이었다. 분명히 다른 방향으로 나왔는데, 같은 집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정우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응시했다. 신호는 없었다. 시간은 오후 세 시였다. 삼십 분이 지났는데 해는 이미 많이 기울어 있었다. 이월의 광주는 해가 빠르다. 골목 안으로 그늘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정우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달렸다. 골목이 꺾이고, 또 꺾이고, 막다른 담벼락이 나왔다가 다시 좁은 통로가 열렸다. 숨이 찼다. 땀이 났다. 그러다가 정우는 멈췄다. 담벼락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종이가 아니라 벽돌에 직접, 손톱이나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서 쓴 글씨였다. '뛰어도 같은 자리입니다.'
정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숨을 고르면서 카메라를 펼쳤다. 오늘 찍은 사진들을 처음부터 확인했다. 골목 입구의 종이, 반쯤 무너진 가옥, 우물, 담벼락의 종이들. 사진들은 또렷했다. 그런데 맨 마지막 사진에서 정우는 숨을 멈췄다. 우물 앞 공터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공터 한쪽 구석에, 사람이 서 있었다. 정우가 그 자리에 있을 때 분명히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담벼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 얼굴은 카메라 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너무 멀고 어두워서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자세, 등을 바짝 붙이고 양팔을 내린 채 서 있는 그 자세가,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정우는 사진을 확대했다. 얼굴이 조금 더 보였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눈이 없었다. 그냥 피부였다. 매끈하게 이어진 피부.
그 순간, 정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가까웠다. 바로 등 뒤에서 들릴 만큼. 정우는 몸을 돌렸다. 골목은 비어 있었다. 그런데 비어 있는 골목의 공기가, 달랐다. 누군가의 체온이 남은 것처럼 따뜻했다. 이월의 골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온기였다. 정우는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이 떨렸다. 앞을 보았다. 골목이 이어졌다. 뒤를 보았다. 골목이 이어졌다. 양쪽 모두 똑같이 생긴 벽돌 담벼락이었다. 정우는 어느 방향이 앞인지, 어느 방향으로 달려왔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정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눈을 다시 떴다. 담벼락에 또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번 종이는 다른 것들과 달리 새 종이였다. 하얗고 깨끗한 종이에, 먹이 아니라 볼펜으로 쓴 글씨였다. 정우는 그 종이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글씨체가 익숙했다. 아주 익숙한 글씨체였다. 정우 자신의 필체였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미 나간 것 같지만, 나간 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오늘 날짜. 그리고 시각. 오후 두 시 사십 분.
정우는 종이를 잡아 뜯었다. 손이 떨렸다. 종이 뒷면에도 글씨가 있었다. '처음 이 골목에 들어왔을 때, 당신 옆에 누가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정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혼자였다. 분명히 혼자 들어왔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확신이 흔들렸다. 골목 입구의 나무 전봇대 앞에서 발을 들이기 직전, 옆에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은 감각이 스며들었다. 실제로 있었는지,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이 만들어 낸 착각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정우는 그 감각을 밀어 내려 했다. 밀어 낼수록 더 선명해졌다. 입구에서, 자신의 왼쪽 어깨 쪽에, 무언가가 서 있었다. 키가 작았다. 어린아이 정도의 키였다. 그리고 그것은 정우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고, 뒤에서 따라 들어왔다.
정우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신호가 없었다. 그런데 문자 메시지가 한 통 와 있었다. 발신인은 '광주 양림동 숙소'였다. 할머니가 보낸 것이었다. '열쇠 반납 시간이 지났습니다. 손님, 지금 어디 계세요?' 메시지 수신 시각은 오후 여섯 시 십오 분이었다. 정우는 화면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여섯 시 이십 분. 어느새 바깥이 어두웠다. 골목 안의 어둠은 사방에서 한꺼번에 내려왔다. 가로등도 없었다. 정우는 손전등 앱을 켰다.
빛 속에서 골목이 다시 보였다. 그리고 정우는 그때서야, 골목 안에 문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수십 번 이 골목들을 오갔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한 문이었다. 낡은 나무 문, 칠이 벗겨진 청록색 문. 문 앞에 작은 신발이 놓여 있었다. 어린아이의 신발이었다. 한 켤레. 코 앞쪽이 흙으로 더럽혀진 낡은 신발. 정우는 그 신발을 보고,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문이 열렸다. 안에서, 천천히.
아무도 없었다. 문 안은 작은 방이었다. 흙바닥, 무너진 서까래, 먼지.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낡은 책상 하나. 책상 위에 메모장이 펼쳐져 있었다. 정우의 메모장이었다. 오늘 취재하면서 적은 메모들, 정우 자신의 글씨로 빼곡한 그 메모장이. 정우는 자신의 가방을 확인했다. 메모장이 없었다. 언제 빠져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정우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메모장을 집어 들었다. 펼쳐진 페이지에 오늘 쓴 메모들이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줄에, 정우가 쓴 기억이 없는 문장이 있었다. 정우의 필체로.
'이 골목에서 나간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나간 것처럼 느낀 사람은 있습니다.'

그 순간 정우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할머니였다. 정우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손님. 지금 숙소에 계세요? 열쇠가 카운터에 있던데요." 정우는 말문이 막혔다. "네?" "아까 체크아웃 하셨잖아요. 열쇠도 두고 가셨고. 짐도 다 챙겨 가셨는데." 정우는 자신의 가방을 내려다봤다. 가방이 있었다. 카메라도 있었다. 메모장을 쥔 손도 있었다. "저 지금 골목 안에 있는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손님. 지금 몇 시예요?" "여섯 시 이십 분요." 또 침묵. "손님." 할머니가 말했다. "지금 여기는 밤 열한 시예요."
전화가 끊겼다.
정우는 스마트폰 화면을 봤다. 시계가 오후 여섯 시 이십일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신호는 없었다. 방금 전화가 온 흔적도 없었다. 부재중 통화도, 통화 기록도. 정우는 방 안에 서서 손전등 빛 안에 있었다. 빛 바깥의 어둠은 두텁고 완전했다. 정우는 문 쪽으로 걸었다.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골목이 보였다. 정우는 문턱을 넘어 골목으로 나왔다. 걷기 시작했다. 골목이 꺾이고, 담벼락이 이어지고, 또 꺾이고. 그러다 갑자기 골목이 끝났다. 익숙한 거리가 나왔다. 가로등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양림동의 바깥 도로였다.
정우는 도로 위에 서서 뒤를 돌아봤다. 골목 입구가 있었다. 낡은 나무 전봇대, 그리고 종이 한 장. 정우는 가까이 다가가 종이를 읽었다. 처음에 읽었던 그 종이였다. '들어오시는 분께. 이 길은 한 번 들어오면 나가는 방향을 잊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정우는 몸을 돌렸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스마트폰을 꺼냈다. 신호가 잡혔다. 시각은 오후 여섯 시 이십삼 분.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정우는 숙소로 걸었다.
할머니는 카운터에 있었다. 정우를 보자 눈을 들었다. "어서 오세요." 평범한 인사였다. 정우는 열쇠를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카메라를 켰다. 오늘 찍은 사진들을 다시 확인했다. 골목 입구의 종이, 가옥의 창문, 우물, 담벼락의 종이들, 공터의 사진. 공터 사진을 다시 열었다. 눈이 없는 얼굴의 사람은 여전히 구석에 서 있었다. 정우는 사진을 확대했다. 이번에는 더 잘 보였다. 그 사람 옆에, 더 작은 형체가 있었다. 어린아이의 키였다. 처음 사진을 확인할 때는 없었던 형체였다. 정우는 화면을 더 확대했다. 두 형체는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두 형체 모두,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향해 있었다. 정우가 서 있었던 방향. 정우는 사진을 닫았다.
메모장을 꺼냈다. 마지막 페이지를 폈다. 취재 메모들이 있었다. 마지막 줄에 정우가 쓴 기억이 없는 문장이 있었다. '이 골목에서 나간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정우는 그 아래에 손을 가져갔다. 다음 줄은 비어 있었다. 정우는 볼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비어 있는 줄에는, 아주 희미하게, 이미 눌린 자국이 있었다. 아직 쓰이지 않은 글씨의 자국. 눌러 쓰기 전에 먼저 생긴 것처럼. 정우는 볼펜을 들어 그 자국 위에 살짝 문질렀다. 글씨가 드러났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